인간관찰록

스무살 무렵엔 그랬다.

눙물슨 2019. 8. 7. 23:37

스무살 무렵에 누군가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원래 그 나이대엔 시간이 느리게 간다. 나이를 먹을 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서, 뒤돌아보면 어느새 몇 년이 지나가있고, 또 뒤돌아보면 인생이 달라져있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지금.. 그 말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고있다.
비슷한 말 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간다." 라는 말도 있었다. 사실 그 말은 크게 공감되지는 않는다. 물론 평생 가기는 하겠지만, 그마저도 연락을 하면서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오래 전 친구들이 하나 둘씩 휴대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막 바꾸기 시작했을 때, 졸업 후 뿔뿔이 흩어진 그 친구들과 나는 계속 사는 얘기를 하고싶어 카카오톡 단체톡방을 만들었다. '&' 라는 단체톡방이라는 표시를 일부러 달고, '친구방' 이라고 써놓았다.
대략 몇년 정도.. 그 친구들과의 대화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간간히 계속 이러졌고, 시간이 지날 수록 스마트폰을 처음 사는 친했던 친구들을 초대해서 대략 9명 내외의 수가 모여서 떠들었다. 어떨 때는 왁자지껄 붉은 알람뱃지가 수백개가 떠있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어떤 말을해도 다들 대답이 없을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 군대를 가기 시작했고, 점점 조용해진 톡방은 다들 한명씩 제대를 하면서 다시 대화가 많아졌다.
군대까지 다녀와서인지 다들 자신만의 가치관이 굳어 잘 맞지 않는 친구들끼리 다툼이 생겼고, 군대를 다녀온 뒤로 술을 자주 마시면서 술을 마실 때마다 개가 되는 친구녀석이 얌전한 친구들에게 험한 말을 계속 해서 분위기가 안좋아지기도 했었다.
결국 나조차도 각자의 사는 얘기보다는 불필요한 다툼만 반복되는 느낌이 들어 톡방을 나왔다. 그 후로는 친구들에게 따로 연락하는 식인데, 다들 내가 나간 뒤로 얼마 안가 톡방이 죽었다는 표현을 썼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채팅방이 모인 창의 저 아래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2016년에 모였던 친구들과 나. 그리 오래된 사진도 아닌데 다들 입은 옷을 보면 아재라고 해도 믿을 정도. 다들 지금도 잘 연락하고 지내지만, 요즈음엔 모두 정장을 입고 일을 한다.

스무살 무렵의 나는 언제나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도, 대학교 진학도 하지 않은 나는 어느 개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과 밥집 그 중간에 있는 애매한 맛집에서 서빙을 하고있었다. 당시 나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어, 또래 이성과 교류하는 것을 굉장히 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만나서 얘기할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저 아르바이트에서 예쁘게 꾸민 손님들을 구경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꿈도, 생각하는 미래도 없는 삶.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엔 아까워서 아르바이트로 푼돈을 벌며 굉장히 많이 절약했던 시기다.
다른 친구들은 나와는 다르게 또래 이성친구들과 섞여서 공부도 하고, 놀러도 다니겠지 생각했는데, 당시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이성친구는 없고 다들 칙칙한 남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엔 전혀 믿지도 않았고 그저 부러워만 했지만, 이후에 그들이 전부 컴퓨터공학과를 재학 중이고, 진짜로 남탕인 캠퍼스라이프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서는 별 생각이 없어졌다.
하지만 길거리엔 커플들이 많았고, 인터넷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알콩달콩한 프로필사진을 보이고 있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람과의 알콩달콩한 모습이 보였다.

2011년, 식당 알바를 할 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직후 식자재를 올리기 위해 창고에 들어가서 찍은 사진

아르바이트조차도 돈을 벌기 위해서보다는 그냥 젊은 또래와 섞이는 것 자체가 좋아서 했던 시기였다. 당시엔 성격 좋은 형과 누나들이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때문에 급여가 굉장히 적었음에도 계속 일했던 기억이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다. 모두에게 잘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안좋게 마무리할 필요는 없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름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작은 것들이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최대한 마무리를 잘 하려고 노력했다.
파스타집, 일식집, 편의점, PC방, 프렌차이즈 카페, 치킨호프, 사무보조.. 단기아르바이트까지 하면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어떠한 시기를 기점으로, 그런 아르바이트들이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급여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주휴수당이라는 것은 받아야하지만 다들 당연하게 안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 야간수당이라는 부분에서는 더욱 더..
야간일은 낮에 하는 일에 비해 한가한 면이 있기 때문에, 급여는 같거나 시급에서 200원 정도 더 받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기였다. 하지만 회사도 마찬가지.. 아웃소싱이나 도급사가 아닌 이상은 당직수당, 야근수당, 휴일근무수당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나는 아마도 당시에 어떤 회사를 들어가지 않고 계속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것은, 시간적으로 부담을 가지고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첫번째로는 고졸에 아무런 자격증도 없는, 이력서도 제대로 쓰지 못할 것 같은 나를 써줄 회사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두번째로는 회사에 대한 그러한 안좋은 인식이었다.

최근 여자친구와 같이 갔던 홍대 테마카페 도화서가

지금은 여러 사람과,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에게도 삶에 있어서 특정한 무언가를 바라볼 때 기준이란 것이 생겼고, 그 기준을 벗어나면 나에게 스트레스가 될 것을 안다. 혹자는 굉장히 빠르게 그런 부분을 캐치해서 많은 경험을 하고서 자신의 사업으로 자리를 잡고, 지금의 나조차 상상할 수 없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도 있고, 돈 대신 자신이 하고싶은 것에 마음껏 열정을 쏟아부어 예술가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사람들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남들보다 느리게 이치를 깨달았고, 지금도 계속 나아지고있는 중이다. 느리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말과는 다르게,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이미 늦었다며 서두르라는 얘기를 습관처럼 쏟아낸다.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지만 인생의 정답이 있을까..
무엇을 하던지 자신에게 의미가 되고, 경험이 되면 그것만으로도 완성된 것이라고 말하고싶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주변과 비교하여 깎아내리는, 스스로 우울해지는 경험을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나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져주지 않고,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그것이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회사에서 외부 고객사 작업지원을 나갔다가 비교적 일찍 퇴근했지만, 집에 들어와서 계속 글을 쓰다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 되버렸다. 음악작업 대신에 계속 글을 쓰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하랴..
새로 줄을 갈아놓은 기타나 조금 치다가 자야겠다.
내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하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가야하는 날이다. 늦은 새벽까지 의미없이 보내지 않고 적어도 6시간은 잘 수 있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