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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찰록

중력

타이어가 다 터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찍은 집앞 사거리 사진

 

지구같은 별들은 중력이란게 있다. 물건을 던지면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 500년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도 그 존재를 인지하고 사는 너무나 당연한 것. 나한테는 그런 중력이 너무 세게 작용하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나는 조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것들의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긍정적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런데 항상 뭔가 잘 풀리려고 하거나 노력을 하려고 하면 옆에서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다른 가정에서는 가족끼리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지만, 내가 속한 이 자그마한 핵가족은 내가 잘되면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가진 것을 뺴앗으려 했다. 돈을 벌면 버는만큼 돈을 달라고 했고, 인간관계가 잘 풀리거나 직장 면접을 보러가려고 하면 악담을 해서 하지 말라는 세뇌를 했다. 그리고 나에겐 재능이 없다는 세뇌를 했다.
그래도 30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가족이라고 해도 미완성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어젯 밤, 오토바이 사고가 났다. 다른 차량과 사고가 난 것이 아니다. 서울 도심지 한복판, 그것도 역에서 1블럭 들어가 있는 곳에서, 차 하나 없는 도로에서 사고가 났다.
가로등도, 표지판도, 반사판도,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도로 위에 그려진 흰색 페인트도 없는 곳에서 직진인 줄 알고 가다가 찰나의 순간 우회전 도로를 만난 것이다. 안전지대는 턱을 높게 해놓고 풀 따위를 심어놓은 낮은 화단같은 느낌이었다. 밤 중엔 내비게이션을 통해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고가 날 수 밖엔 없는 도로였다. 그리고 나는 어젯 밤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을 하다 그 안전지대로 돌진했다.

튕겨져 날아가 한두번 구르고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몰고 집으로 바이크를 가져왔다.
다친 곳은 거의 없었고, 대신 바이크의 앞부분이 많이 다쳤다. 휠이 조금 휘고, 타이어는 찢어져 교체해야하고, 그리고 타이어 안쪽의 주부라는 바람이 들어가는 것도 찢어졌다. 핸들이 돌아가고, 프론트 휀더 일부가 깨져 날아갔다. 그리고 철로 된 휴대폰 거치대도 부러져 날아갔다.
겉으로 봐서는 몰랐는데, 센터에 가서 맡기면서 알게된 것.

수리비가 꽤나 나온다고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다친 곳이 딱히 없었기 떄문. 그저 사고난 다음 날 신촌 거리를 좋은 음악을 들으며 활보했기 때문에, 그리고 날씨도 많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렴 상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 때 뿐..

카카오톡으로 여자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사고 사실을 얘기했고, 여자친구는 그걸로 진지한 얘기를 하고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럴 땐 웃지 말라고 했다.
그 얘길 들으니 20대 초반에 나에게 업무 시간에 자신의 오리털파카를 압구정 갤러리아에 가서 환불해오라는 것을 시킨 여자 상사가 생각났다. 주로 하던 얘기가 나에게 웃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의 서류를 훔쳐가거나, 다른 곳에 놔두거나, 사소한 것들로 찍어누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내겐 웃지 말라는 얘기가 썩 좋게 들리지가 않았다.
여자친구가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는거니까 이해하지만.. 그래도 내가 오토바이를 타는 것 자체가 싫고, 그 때문에 거리를 두겠다는 것에 기분이 쳐졌다.

그렇게 한차례 내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버스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모친이었다.
이번에는 나에게 집 근처 우리은행, 신한은행에 가서 자신이 두고 온 밤색 수첩을 찾아오라는 얘기였다. 중요한게 적혀있다면서. 더 웃긴건 집에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화 직후에 내 전화를 또 차단해놓았다.
결과나, 과정, 그리고 할 수 없는 이유 등을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자주 내 전화를 차단하고는 하지만, 역시나 이런건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본인이 잃어버린 물건을 항상 내가 쉬는 날을 골라 찾아오게 시키는 악취미가 있다. 당연히 찾아주면 고맙단 얘기도 없고, 찾지 못하면 상욕과 인간관계를 끊겠다는 둥의 소리를 들어야한다.
그 은행 사이는 언덕을 넘어 끝과 그 반대편 끝에 위치해있기에, 당장 바이크도 없어서 집에 사놓고 거의 타지 않는 자전거를 간만에 탔다. 기분은 더럽지만 할건 해야지..
자전거 앞뒤 바퀴의 바람이 다 빠져있어서 은행 가는 길에 있는 자전거샵 앞에서 공기를 주입했다. 근데 타이어며 주부며 다 터졌는지 앞뒤 바퀴 둘다 휠 쪽에서 바람이 샌다.
그냥 그 상태로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너무 기분이 안좋았다. 분명 한두시간 전만 해도 음악도 좋고, 날씨도 좋고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이제는 타이어 터진 자전거가 덜컹거리면서 내 몸을 지탱하고 비틀비틀 굴러간다.

확실한 것은 나는 기분이 좋을 때 보다는 기분이 나쁠 때 자신을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싶어진다. 여기저기 연락해도 바쁜 세상이라 연락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털어놓을 사람도 없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고 자전거를 탔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그것도 눈을 감고있는 동안 뿐이었다.

나는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렇기 떄문에 언제나 들어주는 쪽이었고, 상대가 나의 고민을 들어주기엔 그만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 그저 붕 뜬 얘기로만 듣고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축 쳐지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다. 소중한 시간을 서로 힘들게 내서 만나서 고작 한다는 얘기가 그런 축 쳐지는 이야기라니. 지금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고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새삼 오늘 한참 기분이 좋을 때 느껴보니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우울감이 도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몸이 쑤시고 근육이 좀 땡겨도, 중심잡기 힘든 고장난 바이크를 타고 가면서도, 꽤 만만치않은 수리비 견적을 받고서도..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집을 나서기 전에는 음악작업까지 하고 갔다.

 

"중요한거니까 찾아야해, 어젯밤엔 또 술쳐먹고 그러고 들어왔냐?"

'오토바이 사고가 났어요. 별로 큰..'

"어어~~ 알았어. 중요한게 다 들어있는데 상관 없다는거지? 끊어."

 

하나밖엔 없는 가족이란게 이렇게 시궁창인데도 나는 집에 빌붙어있다. 돈을 안버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단지 두가지다.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에 월세로 독립하면 지금의 생활상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는 것이 첫번째고, 전세로 가기엔 돈이 부족해서이다. 서울 시내의 집값은 청년 관련 대출을 받아도 쉽지가 않고, 또 매물도 없다. 있다 쳐도 출퇴근이 문제가 된다.
주변에 나의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개나소나 '그래도 나는 독립' 따위의 얘기를 한다. 진짜로 웃긴 새끼들 뿐이다.
그럼 똑같은 상황에서 해보던가.. 본능적으로 안되면 다시 본가로 들어간다는 옵션이 내재되어 있으니 그렇게 쉽게 얘기하는거겠지만, 나는 일단 나오면 모친과의 연은 끝이다. 나이는 나이대로 차있는데 준비되지 못 한 상태로 나오면 모든 계획이 틀어진다.
나는 그런 갖잖은 조언을 가장하여 씹는 땅콩오징어 취급을 받는 것은 싫다.
내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힘 내라, 잘 풀릴거야' 라는 얘기를 해준건 지금까지 교회의 나이가 엇비슷한 전도사님 뿐이었다. 힘들다는 얘기를 장문으로 SNS에 게시하니까 직접 연락이 와서 평일 저녁에 식사 한끼 하자고 하고 나를 위로해줬다.
SNS를 한두명이 본게 아닌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얘기다. 존나게 힘들 땐 한마디도 없고 연락도 안받던 사람들이.

어쩌면 어제 튕겨져 날아가 굴렀음에도 기분이 좋았던 것은 그냥 후련해서 그랬던 것 같다.
전신은 흙투성이가 되고 조금 쓸린 곳이 있어도 금방 일어나서 나도 멀쩡하고, 오토바이도 시동이 걸린다는 사실도 기분이 좋았고, 이빨 안깨져서 돈 많이 안나가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날아가 구른 것 자체도 뭔가 후련하다. 뒷처리도 힘들고, 아프고, 돈도 깨지고.. 이래저래 사고는 안나게 앞으론 내비를 똑바로 켜야겠지만, 따가운 소리를 속에서 계속 속에서 삭히는게 더 고통스럽고 마주하고싶지 않은 현실이다.

사고는 내가 났고,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왜 그런 따가운 소리를 들어야하는걸까. 대중교통 대신 오토바이를 탄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조금이나마 친한 사람들은 내게 어디가서 뒤지거나 불구가 되거나 팔 잘려봐야 정신차린다는 소리를 한다.
자기 아는 사람이 오토바이 타다가 다리 위에서 사고나서 상하체가 분리되서 죽었다고. 오토바이 타다가 팔이 잘려 지금 왼 팔이 없다고.
별로 나를 걱정해주지 않을만한 사람들이 꼭 하는 얘기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내가 뭔가 물건을 사거나 좋아보이는 일을 하면 가장 먼저 하는 소리가 "근데, 그건 XX가 안좋대, YY사 좋대."
장단에 맞춰서 "크.. 내가 잘못 샀네, 얼른 버리고 그걸로 갈아타야지" 라고 하면 기분 좋아라한다.
고작 말장난 따위에 놀아나는 병신들.. 그러고 본인들은 성취감을 느끼고 뭐라도 된 기분이겠지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것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딱히 중요하지 않은 것은 마이너스던 플러스던 무덤덤하고.
한 때는 '힘내, 잘 될거야' 라는 말이 너무 간절했지만, 이제 그런 말은 그냥 해주면 정말 고마운 사람이고, 좋은 사람과 병신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 정도다.
과거 이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곱씹었다. 밟아도 죽지 않고, 혼자 싸워도 겁먹지 않게 강해지겠다고.
사람을 굉장히 겁내고 있을 때였다.
이제는 어느정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속에 고름이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은 견디기가 힘들다.

나는 그냥 남들 비위나 맞춰주는 줏대 없는 인간이다. 사람들이 나를 멀리할까봐 항상 두려워하고,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상황을 언제나 피해다니는 겁쟁이다. 스스로에게 항상 거짓말은 하는 가식쟁이다.
근데 사람이란게 정말 복잡하고 개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데, 어째서 이렇게 다수가 하나같이 똑같은 바보같은 짓거리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사소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서로가 기분 좋고, 모두가 행복한 일인데 생각 자체를 안한다. 그런 툭툭 내뱉은 바보짓을 거울보고 한번만 해보면 느낌이 확 올텐데.

여튼, 정말 기분이 안좋아졌다. 단 몇시간만에 이모양이다. 내가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 같으면, 나를 밑으로 잡아당기는 그런 중력이 있나보다. 이것도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기분 좋은 스탠스를 유지할 수 있게 더 강해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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